위국일기
따박따박2024-04-08 21:53



아사.
나는 네 엄마가 정말 싫었어. 죽었는데도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사실에도 진절머리가 나.
그래서 네가 언니의 친딸이든 아니든 너에게 특별한 감정은 들지 않아. 길 가다 스치는 모르는 아이한테보다. 근데.
너는, 열다섯 짜리 아이는 이런 추악한 곳에 어울리지 않아. 적어도 난 그렇단 걸 알고 있어. 더 아름다운 걸 누려야 마땅해.
네가 잘 곳은 언제랑 똑같아. 거기밖에 없어. 방은 늘 너저분하고. 난 대체로 기분이 안 좋고, 널 사랑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몰라. 하지만 난 절대 너를 짓밟지 않을 거야. 그래도 좋으면 내일도 모레도 우리 집으로 돌아와.
04.08 22:10

그야 당연…. 아니…,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지….
04.08 22:10

그 아이. …낮에 잠깐 움직이고, 나머지는 계속 잠만 자. …당사자는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…. …그렇게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 걸 억지로 깨워서 갑자기 획을 긋게 해도 되는 건지 두려워.
04.08 22:10

"…저기, 넌 믿지 않을 수도 있고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내 인생도 네 말 한 마디에 달라졌어."
"…거짓말. 내가 뭐라고 했는데?"
"비밀."
04.08 22:10

…나, 엄마를 현재형으로 얘기하네. 이상해.
04.08 22:10

"…마키오 이모는 엄마 얘기를, 늘 과거형으로 해요."
"과거 완료형."
04.08 22:11

"귀엽고, 진짜 착하고, 아직 어린 구석도 있는데…. 그 사람 아이라고 생각하면 가끔 움찔할 때가 있어…."
"…그건, '사랑할 수 없다'는 뜻?"
"…응. 아마 그렇겠지…."
04.08 22:11

하지만 멋대로 죽어버린 사람 잘못이라고 생각한다.
04.08 22:11

"…아사. 네가 내 숨막힘을 이해하지 못하든 나도 네 외로움을 이해 못 해. 그건 너와 내가 별개의 인간이라서야. …소홀했다고 느꼈으면 미안. 그러니까… 서로 다가가자."
"…서로 이해할 수 없는데도?"
"응. 이해할 수 없으니까."
04.08 22:11

그녀는 나의 외로움을 받아주었지만, 이해해주진 않았다.
나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호감을 갖고 있다고 했다. 나를 자기 집에 데리고 왔으면서 혼자 있고 싶어 했다. 내 감정이 나만의 것이듯 그녀의 감정 또한 그녀만의 것이었다. 별개의 인간이었다.
04.08 22:11

…신기해. 넌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게 거북하지 않구나.
…그렇게, 키운 거겠지….
04.08 22:11

"…엄마는, 어떤 사람이었을까…."
"―아무도 몰라."
04.08 22:11

나는
엄마에게도 엄마의, 엄마만의 분노 고독 갈등이 있었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.
알고 싶지도 않았다.
그것은 커다란 구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작업이었고, 그 구멍 바닥에는 '사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.' 하는 괴물스러운 공포가 잠들어 있었다.
04.08 22:11

"싫어!! 되고 싶은 내가 되고 싶다구!!"
"…그건, 영원한 명제지!"
04.08 22:11

하지만 살아있는 내게는 아무리 시답잖아도 고민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.
04.08 22:11

"…'누구를 위해' 같은 걸 물어보는 사람의 행동이념은 남을 위해서인 건가? …만약 네가 그렇다면 이건 마음을 꺾기 위해서 하는 소리가 아냐. 누구를 위해 뭘 한다 해도,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은 결코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좋아. 대부분의 행동은 결실을 맺지 못해. 감사도 없거니와 보답도 없어."
"와, 진짜~. 프로 소설가 주제에…. 뭐랄까… 비관적? 그런 느낌이 들어."
"설득력 있잖아. 근데 뭐,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하니까 존귀한 거라고도 생각해."
04.08 22:11

"…아사, 너 언제 그렇게 어른이 된 거야?"
"에헤헤헤헤. 진짜?!"
"…좀 더 천천히, 좀 더 천천히 커도 돼."
04.08 22:12

…싫다.
…흔들리니까 이러지 마….
04.08 22:12

근데 그래서 그때 마키오 이모가 한 말도―
더 나중에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최근에 들었어.
04.08 22:12

…안 괜찮아. 앞으로도 쭉. 앞으로도 쭈―욱 안 괜찮아. …그치만, 안 괜찮은 채로 살아갈 거니까 괜찮아. 그러기로 했어.
04.08 22:12

1년 뒤면 열여덟인데,
마음만을 그 자리에 내려둔 채 어른이 되는 게 두려웠다.
04.08 22:12

…근데, 뭐. 시간은 불가역적 일방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, 만약 과거를 향해 움직일 수 있다면….
잃게 될 걸 알면서도 사랑한다거나, 죽게 될 걸 알아도 사는 그런 거.
…아닌가. 그것도 전부… 우리는 미래를 향해 움직일 수밖에 없겠다.
04.08 22:12

모르겠으니까 계속 생각하게 되잖아. 언제까지 생각하게 될까. 언제까지 생각해야 할까.
언제 잊을 수 있어?
04.08 22:12

…왠지, …뭘 해주고 싶다고 생각할수록 여러 갈래로 갈라져. 마음이…. …언니를 계속 싫어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…. ―이런 애를 두고 먼저 죽는 건 얼마나 두려웠을까, 라든가.
…내 일방적인 상상이지만 상상하기가 쉬워졌어.
06.29 00:28

그래.
하지만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공포를 이겨내는 행위 아닌가.
06.29 00:28

"…내가 준 만큼 돌려받지 못해도 된다고 생각하거나, 조금 거리를 두고 그 사람과 관련되고 싶다거나. 위성이란 건 그런 느낌이야."
"…궤도를 이탈해도 원망 안 해."
"그 한 마디를 보태고 마는 공포를 극복해, 넌."
06.29 00:28

언니,
내가,
내가 언니의 소중한 그 아이를 소중히 여겨도 될까?
06.29 00:29

하지만, '그래도'.
'그래도', '그래도', '그래도'라고,
저는 생각해요.
06.29 00:29

"…알아요. 안다기보다 사실 모르지만, 알아요. 뭐랄까, …알고 있어요. ……감사합니다. 하― 이렇게 잔소리 많은 어른들이 잔뜩 있으니, 전 행복한 사람일까요? …부모님이 돌아가신 시점에서 행복한 건 아닌 걸까요?"
"…인과관계는 부정할 수 없지만 병렬해서 언급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."
"하아―, 정말 정론만 말하지 말아 주세요."
"그건 어렵습니다."
06.29 00:29

…아사. …있고 싶은 만큼 여기 있어도 돼. …내가 싫어지면 두 번 다시 안 와도 되고, 몇 년이든… 원한다면 평생 나한테 연락하지 않아도 돼.
하지만 언제든 여기 돌아와서 지내도 되고, 이대로 평생 여기 있어도 돼.
난 늘 기분이 별로고, 방은 너저분하고, 요리는 매번 그게 그거지만 그래도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.
이렇게 말하면 꼭 행복해야만 할 것 같네. 가끔은 불행해도 돼.
06.29 00:29

"…어떻게 한 번을, 그냥 날 사랑한다고 말을 못 해…?"

"……그런 말로는 부족해."
"부족해."
"…부족하다고."
06.29 00:29

그날 그 사람은 무리에서 떨어져나온 늑대같은 눈으로 천애고아가 될 나의 운명을 물리쳤다.
06.29 00:29